한국 편의점, 30년 만에 첫 역성장... "생존 전략 급선회"
박세현 기자
shpark@fransight.kr | 2025-10-25 07:34:11
이커머스 물류혁명에 '즉시성' 무너지며 체질 개선 나서
[프랜사이트 = 박세현 기자]
30년간 지속된 한국 편의점 산업의 성장 신화가 멈춰 섰다. 통계 작성 이래 처음으로 점포 수가 감소했고, 매출마저 역성장을 기록하며 업계 전반에 비상등이 켜졌다. '불황에도 강한 업종'이라는 공식이 깨지면서, 편의점 업계는 양적 팽창에서 질적 혁신으로 급선회하고 있다.
사상 첫 역성장, 점포 감소·매출 하락 동반
한국편의점산업협회에 따르면, 2024년 말 기준 전국 편의점 수는 전년 대비 감소세로 전환됐다. GS25·CU·세븐일레븐 등 주요 3사의 점포 수는 2024년 7월 기준 전년 동기 대비 약 1,000개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
매출 지표도 하락했다. 올해 1분기 편의점 업계 전체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0.4% 감소했으며, CU와 GS25의 영업이익은 30% 이상 급감했다. 임차료와 인건비 등 고정비 부담이 지속되는 가운데 매출이 줄면서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된 것이다.
일부 본부에서는 실적 부진 점포를 대상으로 위약금 없는 폐점을 권유하고 있으며, 실제 폐점 결정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기존 점포의 수익성이 한계에 달하면서 본부도 유지보다 정리를 선택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포화 상태의 그림자... 인구 943명당 1개 점포
위기의 근본 원인은 '포화'로 압축된다. 현재 국내 편의점은 약 5만 개로, 인구 943명당 편의점 1개꼴이다. 이는 일본(약 2,000명당 1개)의 두 배 이상으로,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밀집도다.
2010년대 초반까지 매년 1,000개 이상 신규 출점이 이어지면서 동일 상권 내 브랜드 중복 출점이 과열됐고, 결과적으로 제한된 수요를 두고 과당 경쟁이 벌어졌다. 점포당 평균 매출은 지속적으로 하락했으며, 이는 고스란히 가맹점주의 부담으로 전가됐다.
여기에 고물가와 경기 침체가 겹쳤다. 소비 여력이 줄면서 편의점 매출의 핵심인 '즉흥 구매'가 급감했다. 도시락, 음료, 디저트 등 고마진 상품의 판매 둔화는 직접적인 수익 타격으로 이어졌다.
기후 변화도 변수로 작용했다. 여름철 폭염과 국지성 호우가 잦아지면서 외출 빈도 자체가 줄었고, 과거 무더위 속 음료 구매를 위해 편의점을 찾던 소비 패턴이 온라인 주문으로 대체되고 있다.
이커머스 물류 혁신이 무너뜨린 '즉시성'
편의점의 최대 경쟁력은 '즉시성'이었다. 하지만 이커머스의 물류 혁신이 이마저도 위협하고 있다. 쿠팡의 로켓배송, 네이버의 당일배송, 마켓컬리의 샛별배송 등 초고속 물류 시스템이 "지금 당장"이라는 소비자 욕구를 온라인으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특히 편의점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식품 카테고리에서 타격이 컸다. 간편식, 음료, 스낵 등은 이제 온라인 주문으로 새벽이나 당일에 받을 수 있다. 소비자들은 '24시간 열려 있는 편의점' 대신 '24시간 주문 가능한 앱'을 선택하고 있다. 결국 '시간과 거리의 편의성'이라는 핵심 가치가 약화되면서 편의점의 정체성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다.
체질 개선 나선 업계... 수익성·체험·디지털로 전환
위기 속에서 편의점 업계는 '체질 개선'에 나섰다. 단순한 점포 확장에서 벗어나 수익성 중심의 질적 성장으로 전략을 전환하고 있다.
수익성 강화
GS25는 올 상반기 100개 이상 점포를 폐점하며 효율화를 단행했다. 본부들은 순증 목표치를 대폭 낮추고, 상권 중복 지역은 통합 또는 이전을 통해 점포당 수익률 제고에 집중하고 있다.
체류형 플랫폼 전환
단순 구매 공간을 넘어 고객이 '머무는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GS25는 인사동점에 AI 뷰티 디바이스를 설치해 체험형 매장으로 변모했고, CU는 명동역점에 타투 키오스크를 도입했다. 팝업스토어를 통한 체험형 카테고리 강화도 이어지고 있다. GS25는 일본 돈키호테와, CU는 K리그·디즈니와 협업 팝업을 전개했다.
카테고리 킬러형 매장 확대
편의점의 접근성을 활용한 건강기능식품·뷰티 전문 매대가 확대되고 있다. GS25는 전국 500개 점포에, CU는 6,000여 개 점포에 관련 코너를 운영 중이다. 세븐일레븐은 음식·패션·뷰티를 결합한 '뉴웨이브 매장'을 선보이며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퀵커머스 진출 가속
배달 플랫폼과의 제휴를 통해 이커머스의 속도 경쟁에 맞서고 있다. GS리테일은 요기요·배달의민족·쿠팡이츠 등 주요 플랫폼과 협업하며 퀵커머스 매출이 전년 대비 71% 증가했다. CU는 네이버를 통한 배달 서비스를 개시했으며, 자체 커피 브랜드 '겟커피'를 배민 스토어에 입점시켜 심야 배달 준비에 나섰다.
해외 진출 확대
국내 성장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출구 전략도 활발하다. GS25는 베트남·몽골·사우디아라비아 등으로 현지 법인을 확장하며 2025년까지 글로벌 1,000호점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CU는 몽골·말레이시아·카자흐스탄에 이어 하와이 진출을 앞두고 있으며, 이마트24는 업계 최초로 캄보디아·인도·라오스 시장까지 진출했다.
정부 쿠폰 효과는 일시적... 장기 생존은 혁신에 달려
최근 정부의 민생 회복 소비 쿠폰 정책이 일시적으로 편의점 매출을 견인했다. 일부 업계에서는 "쿠폰 특수로 숨통이 트였다"는 반응도 나왔지만, 이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근본 대책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업계는 장기 생존을 위해 ▲점포 경쟁력 강화 ▲상품 차별화 ▲AI 기반 디지털 혁신에 주력하고 있다. AI 수요 예측 시스템, 무인 계산대, 데이터 기반 상품 기획 등 기술 도입이 가속화되고 있으며, 이는 인건비 절감과 재고 효율화로 이어질 전망이다.
'새로운 편의'의 정의가 생존 가른다
편의점 업계의 변화는 궁극적으로 소비자 경험의 혁신으로 귀결될 것으로 보인다. 배달·결제·체험 등 전 과정에 디지털 기술이 접목되면서, 향후 편의점은 '상품을 파는 곳'이 아닌 '생활 솔루션 허브'로 진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 업계 전문가는 "편의점 산업은 단기 불황이 아니라 산업 구조의 대전환기에 있다"며 "누가 먼저 '새로운 편의의 정의'를 제시하느냐가 생존의 관건"이라고 분석했다.
편의점은 한국 유통의 거울이다. 24시간 불빛이 꺼지기 시작한 지금, 이는 단순한 점포 수의 문제가 아니라 유통 구조 전환의 신호로 읽어야 한다. 편의점의 위기는 곧 소비 패턴의 변화이며, 동시에 산업 혁신의 촉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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