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커머스 특집②] 편의점이 물류센터 되는 시대, 한국 퀵커머스의 진화
우승련 기자
srwoo@fransight.kr | 2025-11-08 08:33:53
2025년 4조원 시장으로 성장…정부 규제와 혁신의 줄타기
동네 가게가 살아남는 법, '초단기 배송'에서 답을 찾다
[프랜사이트 = 우승련 기자]
밤 11시, 갑자기 내리는 비에 편의점까지 나가기 귀찮았던 김모(32)씨는 스마트폰 앱을 켰다. 우산과 라면, 과자를 담고 주문 버튼을 누르자 "15분 후 도착 예정"이라는 메시지가 떴다. 실제로 14분 만에 현관 앞에 물건이 도착했다. 이제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한국의 큐커머스(Q-Commerce, Quick Commerce) 시장이 우리 일상을 빠르게 바꾸고 있다.
4조원 시장, 편의점 밀집도가 만든 한국형 모델
2025년 기준 한국 퀵커머스 시장 규모는 약 4조4000억원으로 추산된다. 2030년에는 5조9000억원까지 성장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꾸준한 성장세와 구조적 수요 증가는 명확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 퀵커머스의 가장 큰 특징은 세계 최고 수준의 편의점 밀집도다. 다른 나라들이 '다크스토어'(배송 전용 소형 창고)를 새로 지어야 했다면, 한국은 이미 전국에 깔린 편의점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었다. 배민 B마트, 쿠팡이츠, 요기요, 네이버 등 주요 플랫폼들은 앞다퉈 기존 매장들과 손잡고 '마이크로 물류거점' 전략을 펼치고 있다.
GS리테일은 지난해 장마철 날씨 영향으로 주문량이 평균 49% 상승했다고 밝혔다. 비가 오면 매출이 늘어나는 새로운 수익 패턴이 만들어진 것이다. CU를 운영하는 BGF리테일도 포켓CU 앱과 배달 플랫폼을 연결해 커피와 간식 소량 배송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
정부, 혁신과 안전 사이 균형점 찾기
급성장하는 퀵커머스 시장에 정부도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2021년 시행된 「생활물류서비스산업발전법」은 퀵커머스를 제도권으로 편입시킨 핵심 법안이다. 사업자 등록제, 표준약관 도입, 근로자 안전 및 보험 의무화 등을 규정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로봇 배송 정책이다. 2024년 「지능형로봇법」과 「도로교통법」 개정으로 인증받은 배달로봇은 보행자 지위를 받아 보도 통행이 허용됐다. 최대 시속 15km로 움직이는 이 로봇들은 서울, 성남, 세종 등지에서 시범사업을 진행 중이다. 인력 부담을 줄이고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크다.
서울시의 상가 의무비율 축소 정책(20%→10%)도 퀵커머스 업체들에게는 기회다. 도심 1층 상가 공급이 줄어드는 대신, 소형 물류 노드 활용 기회가 늘어나 도심 거점 확보가 수월해졌다.
소상공인에게 독? 약?
퀵커머스는 소상공인과 프랜차이즈 가맹점주들에게 기회이자 도전이다. 비 오는 날이나 심야 시간대 주문이 급증하면서 '비피크 타임 매출 보완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소량 주문이지만 재구매 빈도가 높아 새로운 수익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플랫폼 수수료와 배송비 부담은 여전히 큰 고민거리다. 재고 관리와 근무 스케줄링 문제도 발생한다. 대부분의 가맹점은 배민, 요기요, 쿠팡, 네이버 등 여러 플랫폼에 동시 입점해 판매를 다변화하지만, 운영 복잡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업계 관계자는 "단순히 빠르게 배송하는 것만으로는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며 "지역 특화상품이나 시니어 전용 패키지, 정기배송 서비스 등 차별화된 상품 큐레이션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동네 가게의 생존 전략
전문가들은 중소사업자들에게 몇 가지 기회를 제시한다. 첫째, 동네 기반 마이크로 물류거점화다. 반경 1~1.5km 배송망을 촘촘하게 구축하면 대형 플랫폼과도 경쟁할 수 있다. 둘째, 시니어 맞춤형 즉시 배송이다. 음성 명령이나 전화 주문, 건강용품 패키지 등 고령층을 위한 서비스는 블루오션이다. 셋째, 날씨나 이벤트를 활용한 트리거 상품이다. 비·눈·더위 등 날씨 변화에 맞춘 특화 메뉴를 준비하면 급격한 수요 증가에 대응할 수 있다.
로봇 배송 도입 지역도 주목해야 한다. 대학 캠퍼스나 복합시설 단지에서는 로봇 배송이 빠르게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지역에 먼저 진출하면 선점 효과를 누릴 수 있다.
플랫폼 전쟁, 다음 챕터는?
주요 플랫폼들의 전략도 진화하고 있다. 쿠팡이츠는 음식 배달 중심에서 벗어나 '쇼핑' 카테고리를 신설하며 비식품 영역을 공략하고 있다. 배민 B마트는 새벽배송 테스트와 피킹센터(PPC) 확장을 진행 중이다. 네이버는 'Now Delivery'로 CU, GS25, 이마트 에브리데이와 협력해 1시간 이내 매장 직배송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
국회에서는 배송노동자 보험 의무화와 알고리즘 투명성 공개 법안이 논의되고 있다. 적정 배달료 기준과 근로 조건 개선도 뜨거운 이슈다. 업계는 "혁신 촉진과 노동자 보호의 균형"이 한국 퀵커머스의 지속 가능성을 좌우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AI와 로봇, 승자를 가른다
장기적으로는 AI와 로봇, 데이터 활용 역량이 성패를 결정할 전망이다. 한국 정부는 로봇 배달과 AI 물류 인프라에 대한 공공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편의점 경제와 AI 물류가 결합된 한국형 퀵커머스 모델은 세계적으로도 독특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유통업계 한 전문가는 "한국의 퀵커머스는 이미 성숙한 소비문화와 편의점 인프라 덕분에 세계적으로 특이한 발전 경로를 보이고 있다"며 "정책 지원, 기술 혁신, 현장 적용 역량이 조화를 이룰 때 소상공인과 프랜차이즈 모두에게 지속 가능한 기회가 열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10분이면 무엇이든 도착하는 시대. 동네 편의점이 물류센터가 되고, 로봇이 골목길을 누비는 풍경이 이제 우리의 일상이 되고 있다. 변화의 물결 속에서 누가 살아남고, 누가 새로운 기회를 잡을 것인가. 한국 퀵커머스의 진화는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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