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피크제·성과급제 대안 제시되지만 "임금삭감 강요" 반발 우려도

[프랜사이트 = 특별취재팀 박세현, 허양 기자]
정년연장을 둘러싼 논쟁에서 기업들이 가장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우리나라 특유의 연공서열형 임금체계 하에서 5년 정년연장이 곧바로 '인건비 폭탄'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임금체계 개편 없는 정년연장이 오히려 청년고용 위축과 기업 경쟁력 저하를 동시에 부를 수 있다고 경고한다.
기업 10곳 중 8곳 "인건비 부담 과중" 호소
2025년 3월 국민연금 개혁안 통과 직후, 정부가 법정 정년을 65세로 늘리는 방안을 공식 발표하자 가장 강하게 반발한 주체는 기업이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실시한 '정년연장 관련 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 기업의 78.3%가 "현행 임금체계에서 정년연장이 시행될 경우 인건비 부담이 과중할 것"이라고 답했다. 또 82.1%는 "정년연장보다 재고용이나 계속고용 방식이 더 바람직하다"고 응답했다. 기업들의 우려는 구체적이다. 한국의 임금체계가 여전히 연공서열형이어서 나이가 들수록, 근속연수가 길수록 생산성과 무관하게 임금이 오르는 구조가 뿌리깊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정년을 60세에서 65세로 늘리면 기업은 최소 5년간 '고비용 근로자'를 추가로 떠안아야 한다.
OECD와 정반대인 한국 임금곡선의 함정
국제 비교를 통해 보면 한국 기업의 불안이 단순한 핑계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OECD 국가 대부분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임금 곡선이 정점을 찍고 이후 완만하게 하락한다. 하지만 한국은 50대 중후반까지 가파르게 상승한 뒤에야 떨어진다. 이 구조에서 정년연장은 곧바로 인건비 폭탄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55세 대기업 부장의 연봉이 1억원이라면, 정년이 65세로 늘어나는 순간 기업은 5년간 최소 5억원 이상을 추가 부담해야 한다. 이는 신규 채용 3~4명의 몫에 해당한다. 결국 정년연장이 청년고용 축소로 직결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대기업도 중소기업도 "감당 어려워"
한 대기업 인사담당자는 "생산성은 정체되는데 임금은 오르는 구조에서 정년만 늘린다면 기업 경쟁력은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결국 신규 채용을 줄이고 내부 구조조정을 확대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중소기업 현실은 더 팍팍하다. 서울 구로구에서 제조업을 운영하는 한 중소기업 대표는 "60세 이후 고령 근로자 임금을 유지하면서 젊은 인력까지 고용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정년연장은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에 더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기업계는 정부의 '정년연장-연금개혁 패키지 추진'이 현실을 무시한 정치적 선택이라고 비판한다. 청년채용 확대라는 국가과제와 정년연장 정책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기업이 사실상 이중부담을 떠안는다는 것이다.
임금피크제·성과급제 대안, 실효성 논란
정부와 기업 모두가 내놓는 대안은 임금피크제와 성과급제다. 일정 연령 이후 임금을 점진적으로 삭감하면서도 고용은 유지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실효성에 대한 논란이 크다. 대기업 임금피크제의 경우 임금 삭감 폭이 평균 20~40%에 이른다. 58세 이후 임금이 30% 줄어든다면 고령 근로자는 사실상 강제적 소득 감소를 받아들여야 한다. 고용이 보장된다지만 현장에서는 "임금 줄이고 계속 일하라는 강요"라는 불만이 쏟아진다. 성과급제 역시 마찬가지다. '성과에 따라 보상한다'는 취지는 타당하지만, 성과 측정 기준이 불투명하거나 주관적일 경우 오히려 갈등을 키울 수 있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성과를 내기 어려운 직무환경에서는 사실상 임금 삭감으로 귀결된다.
일본 '계속고용제' 모델의 교훈
일본은 정년을 법적으로 60세로 유지하면서 65세까지 고용을 보장하는 '계속고용제'를 도입했다. 기업은 정년연장, 재고용, 정년폐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대부분 기업이 '재고용'을 택하면서 고령 근로자는 기존 절반 수준 임금으로 다시 계약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에서도 계속고용제가 거론되지만, 일본 사례는 경고를 준다. 정년연장이 임금삭감형 재고용으로 귀결된다면 고령 근로자에게는 고용보장이 아닌 임금차별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 "임금체계 개편이 선결과제"
서울대 김대일 교수는 "정년연장은 기업의 인건비 부담과 청년고용 위축을 동시에 불러오는 양날의 검"이라며 "임금체계 개편 없이는 해법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임금피크제와 성과급제가 해법이 되려면 기업 내부의 공정성과 투명성이 전제되어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고령 근로자 불만과 세대 갈등을 오히려 확대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몇 살까지'가 아닌 '어떤 조건으로' 일할 것인가
정년연장은 단순히 고령 근로자의 생계보장 문제가 아니다. 기업의 인건비 구조와 직결되고 청년 고용기회와도 맞물려 있다. 결국 해법은 '임금체계 개편'이라는 본질로 귀결된다. 연공서열형 임금구조를 직무·성과 중심으로 바꾸지 않는 한, 정년연장은 기업과 청년 모두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 기업의 반발을 무조건 이해관계 충돌로만 치부할 수도 없다. 한국 특유의 임금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정년연장은 사회 전체의 부담을 가중시킬 뿐이다. 이번 논의는 단순히 '몇 살까지 일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조건으로 일할 것인가'라는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정년연장의 성공 여부는 이 질문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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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정년연장 및 연금정책 분석 5부작 중 3편입니다. 다음 4편에서는 덴마크·프랑스·독일·일본 등 주요국의 정년연장 정책 사례와 한국이 얻을 교훈을 분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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