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재고용제는 "같은 일해도 절반 월급" 불만 확산… 사회적 합의가 성패 좌우

[프랜사이트 = 특별취재팀 박세현, 허양 기자]
해외 주요국들의 정년연장 정책은 성공과 실패가 엇갈린다. 덴마크는 70세 정년 도입으로 직종 간 갈등이 폭발했고, 프랑스는 사회적 합의 없는 강행으로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반면 독일은 17년에 걸친 점진적 접근으로 충격을 최소화했다. 한국이 2025년부터 본격 추진하는 정년연장 정책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덴마크 "70세까지 벽돌 나르라고?"… 직종별 갈등 폭발
5월 22일 덴마크 의회는 은퇴 연령을 70세로 연장하는 법안을 찬성 81표, 반대 21표로 통과시켰다. 이로써 덴마크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정년을 가진 국가 중 하나가 됐다. 적용 대상은 1971년생부터로, 현재 54세인 이들은 앞으로 70세까지 일해야만 연금을 받을 수 있다. 코펜하겐 거리에는 노동조합 주도의 시위가 이어졌다. 건설·제조업 등 육체노동 직종 노동자들은 "언제까지 벽돌을 나르라는 것이냐"는 분노를 터뜨렸다. 반면 사무직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수용 여지가 크다. 같은 '70세 정년'이 직종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덴마크는 그동안 높은 세금과 두터운 복지를 기반으로 한 '사회적 합의 모델'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이번 정년연장은 그 합의 전통에 균열을 냈다. 사무직과 육체노동 직종 사이의 갈등,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 간의 불만이 동시에 폭발했다. 한국 역시 단일 기준으로 정년을 일괄 연장할 경우 비슷한 갈등을 피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덴마크 사례는 경고가 된다.
프랑스 개혁 강행 2년 후 "재협상 카드" 등장
프랑스는 2023년 은퇴 연령을 62세에서 64세로 늘리는 개혁 과정에서 극심한 사회적 갈등을 겪었다. 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고, 쓰레기 수거 노동자 파업으로 파리 곳곳이 쓰레기 더미로 뒤덮였다. 여론조사에서는 국민 70%가 개혁에 반대했다. 결국 마크롱 대통령은 의회 표결을 거치지 않고 헌법 조항을 활용해 개혁안을 강행 처리했다. 제도는 시행됐지만 사회적 신뢰는 무너졌다. 2년이 지난 2025년, 새 총리 바이루가 등장하면서 '재협상 카드'가 다시 꺼내졌다. 하지만 개혁안을 되돌릴지, 유지할지 어느 쪽도 사회적 비용이 크다는 딜레마에 빠졌다. 프랑스 사례는 사회적 합의 없는 개혁이 어떤 후폭풍을 불러오는지 보여준다. 한국이 서둘러 밀어붙일 경우 제도의 안정성보다 사회적 불안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일본 재고용제 "고용보장 vs 임금삭감" 딜레마
일본은 정년을 60세로 유지하면서 65세까지 고용을 확보하도록 기업에 의무를 부여했다. 이어 2021년부터는 70세까지 고용을 '노력 의무'로 규정했다. 기업은 △정년연장 △정년폐지 △재고용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데, 대부분이 '재고용'을 택했다. 문제는 재고용 조건이다. 일본 기업 상당수는 65세 이후 재고용 시 임금을 기존의 55~80% 수준으로 낮췄다. '고용 보장'이라는 장점 뒤에 '임금 삭감'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이다. 일본 고령 근로자들은 "같은 일을 해도 절반 월급"이라는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또한 일본은 연금 재정을 자동 조정하는 '거시경제슬라이드'를 도입해 급여액을 경제성장률과 인구구조에 따라 유연하게 변동시켰다. 제도의 안정성은 확보했지만 그만큼 연금 수령액이 줄어드는 결과로 이어졌다.
독일 "17년 점진적 연장+부분연금" 성공모델
독일은 정년을 65세에서 67세로 올리는 과정을 무려 17년에 걸쳐 진행하고 있다. 매년 1개월씩 연장하는 초점진적 방식이다. 급격한 사회적 충격을 피하고 노동자와 기업 모두가 준비할 시간을 확보한다는 계산이다. 더 주목할 점은 '부분연금' 제도다. 만 62세부터 일정 비율의 연금을 먼저 받으면서 파트타임 근무를 할 수 있게 했다. 예를 들어 전체 연금액의 50%를 받으면서 주 20시간만 일할 수 있다. 고령자는 소득 공백 없이 점진적으로 은퇴하고, 기업은 숙련된 인력을 유지할 수 있으며, 연금 재정도 안정적으로 관리된다. 독일의 경험은 한국이 단계적 접근과 유연한 은퇴 제도를 결합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전문가들 "한국형 모델 설계가 관건"
해외 사례를 분석한 전문가들은 한국이 피해야 할 함정들을 명확히 지적한다. 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 이용하 교수는 "덴마크는 직종별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 연장이 갈등을 키웠고, 프랑스는 사회적 합의 없는 개혁이 정치적 혼란을 불러왔다"며 "한국은 이런 실패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노동연구원 방하남 선임연구위원은 "일본의 임금 삭감형 재고용이나 독일의 점진적 접근 모두 나름의 장단점이 있다"며 "한국은 네 가지 경험에서 교훈을 압축적으로 얻어 ▲직종별 차등 접근 ▲충분한 사회적 합의 ▲임금체계 개편 동반 ▲점진적 제도 설계를 핵심으로 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초저출산·초고령화 속 한국의 선택
한국은 초저출산·초고령화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파른 인구구조 변화를 겪고 있다. 단순히 '연령 숫자'를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일할 것인가'와 '누가 비용을 부담할 것인가'를 사회 전체가 합의해야 한다. 정년연장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지만, 그 방식은 선택의 문제다. 한국이 2025년부터 시작하는 단계적 정년연장은 올바른 방향일 수 있다. 그러나 해외의 실패와 성공을 동시에 참고하지 않는다면 사회적 비용은 걷잡을 수 없게 커질 것이다. 특히 유럽의 경험은 한국에 분명한 경고를 준다. 덴마크식 직종 무시, 프랑스식 합의 생략, 일본식 임금 삭감을 피하고 독일식 점진적 접근을 벤치마킹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정년연장 정책의 성패는 결국 얼마나 치밀하게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제도 설계만큼이나 사회적 소통이 중요한 이유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 기사는 정년연장 및 연금정책 분석 5부작 중 4편입니다. 다음 5편(완결)에서는 한국형 해법으로서 임금체계 개편·세대 간 상생·다층보장체계 구축 방안을 종합 제시합니다.
[저작권자ⓒ 프랜사이트 (FranSight).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