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대화 제도화 통해 청년·중장년·기업 모두 참여하는 '새 사회계약' 필요

[프랜사이트 = 특별취재팀 박세현, 허양 기자]
3월 연금개혁안 통과 이후 한국 사회는 65세 정년시대를 앞두고 거대한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전문가들은 단순한 '숫자 논쟁'을 넘어 임금체계와 노동시장 구조 전반을 아우르는 '구조적 접근'만이 세대 간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고 진단한다.
획일적 정년연장의 한계… 직종별 차등 접근 불가피
연금개혁안 통과 이후 한국 사회는 자연스레 "몇 살까지 일할 것인가"라는 숫자 논쟁에 매몰돼 있다. 그러나 실상은 더 복잡하다. 단순히 정년 나이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청년 고용 불안, 기업의 인건비 폭탄, 중장년층의 소득 공백이라는 세 갈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없다. 덴마크 사례가 보여주듯 획일적 정년연장은 갈등을 불러오기 쉽다. 사무직과 육체노동 직종을 같은 기준으로 70세까지 일하게 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한국도 건설업, 제조업, 서비스업 등 업종별로 신체적 부담과 근로 환경이 크게 다르다. 따라서 직종별·업종별 차등 정년제 도입 논의가 필요하다. 예컨대 사무직은 정년을 65세로 늘리되, 고강도 육체노동 직종은 60세 또는 62세에서 퇴직 후 재고용이나 전환배치 기회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이는 단순한 특혜가 아니라 노동의 성격에 맞는 합리적 조정이다.
연공서열 임금체계 개편,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정년연장 논의에서 반복적으로 지적되는 문제는 한국 특유의 연공서열형 임금 구조다. 50대 중반까지 임금이 가파르게 오르는 현 구조에서는 정년연장이 곧 인건비 폭탄으로 이어진다. 서울대 김대일 교수는 "직무·성과 중심의 임금체계 전환이 선행되지 않으면 정년연장은 세대 갈등을 심화시킬 뿐"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OECD 국가 대부분은 40대 이후 임금이 완만히 하락하는 반면, 한국은 50대 후반까지 상승한다. 이 곡선을 바꾸지 않는다면 청년 고용과 기업 부담 문제는 풀릴 수 없다. 임금피크제는 부분적 해법이 될 수 있지만, 제대로 설계되지 않으면 '임금 삭감 꼼수'라는 불신만 키운다. 성과급제 역시 투명한 기준과 사회적 신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갈등을 심화시킬 뿐이다. 결국 본질은 투명하고 공정한 임금체계 개편이다.
국민연금 의존도 줄이는 다층보장체계 구축
현재 한국의 노후소득 보장은 국민연금에 과도하게 의존한다. 독일의 '리스터연금'처럼 공적연금을 보완하는 사적연금 활성화 없이는 안정적 노후 보장이 불가능하다. 퇴직연금, 개인연금의 제도적 장치와 세제 혜택을 강화해 다층보장체계를 완성해야 한다. 국민연금 하나에만 의존하는 구조에서는 기금 고갈 논란이 주기적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다. 공적연금은 기본 안전망, 퇴직연금과 개인연금은 보완 장치라는 삼중 구조를 확립하는 것이 해법이다. 이를 통해 국민연금의 부담을 줄이고 개인의 선택권을 확대할 수 있다.
프랑스式 강행 피하는 사회적 대화 제도화
프랑스의 실패가 보여주듯 사회적 합의 없는 개혁은 장기적 혼란을 부른다. 한국 역시 정치적 계산에 따라 법안을 강행 처리한다면 청년·중장년·기업 모두의 반발을 동시에 불러올 수 있다. 따라서 정부·기업·노동계뿐만 아니라 청년 세대와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까지 참여하는 사회적 대화 제도화가 필요하다. 연금개혁과 정년연장은 특정 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세대 계약'을 새로 쓰는 과정이다. 모든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합의 없이는 제도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독일처럼 17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추진하면서 사회적 수용성을 높이는 방식을 참고할 만하다.
세대 상생 위한 일자리 파이 확대 전략
정년연장이 청년 일자리를 잠식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도 병행돼야 한다. 독일식 부분연금처럼 고령 근로자가 점진적으로 은퇴하면서 청년과 일자리를 나눌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 재교육·전환배치를 통해 고령 근로자가 단순히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역할을 맡도록 하는 정책도 중요하다. 또한 청년 고용 확대를 위한 국가 차원의 투자, 혁신 산업 육성, 창업 지원 정책도 함께 설계돼야 한다. 세대 갈등을 해소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일자리 파이를 키우는 것이다. 제로섬 게임이 아닌 윈-윈 구조를 만드는 것이 관건이다.
전문가들 "5대 과제 동시 추진이 성공 열쇠"
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 이용하 교수는 "한국형 해법은 분명하다"며 "▲직종별 차등 정년제 ▲임금체계 개편 ▲다층보장체계 구축 ▲사회적 대화 제도화 ▲세대 간 상생 전략이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노동연구원 방하남 선임연구위원은 "어느 하나만 빠져도 정년연장은 갈등의 뇌관이 될 수 있다"며 "특히 임금체계 개편 없는 정년연장은 재앙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새로운 사회계약의 출발점
정년연장과 연금개혁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 그러나 그 성공 여부는 '숫자'가 아니라 '조건'에 달려 있다. 몇 살까지 일하느냐보다 어떤 조건에서 일하고, 누가 비용을 어떻게 분담하며, 세대 간 상생 구조를 어떻게 설계하느냐가 본질이다. 2025년 연금개혁안 통과와 정년연장 논의는 한국 사회가 새로운 사회계약을 써 내려가는 출발점이다. 이제 남은 과제는 갈등을 관리하고 합의를 만들어내며 미래 세대에게 지속가능한 제도를 물려주는 것이다. 한국형 해법의 윤곽은 이미 드러났다. 문제는 실행 의지와 사회적 합의다. 숫자 논쟁을 넘어 구조적 문제에 집중하고, 모든 세대가 함께 참여하는 대화의 장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년연장 정책의 성패는 결국 얼마나 포용적이고 지속가능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 도전이 지금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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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정년연장 및 연금정책 분석 5부작의 완결편입니다. 한국 사회가 직면한 구조적 과제와 해법을 종합적으로 제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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