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즈맨의 죽음' 속 생존 철학이 2025년 자영업 현실을 관통하다
[프랜사이트 = 우승련 취재본부장]
새벽 5시, 재료를 손질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점주의 한숨은 단순한 피로가 아니다. 배달 플랫폼 수수료와 인건비 상승, 원재료 가격 인상과 제자리걸음인 매출 사이에서 느끼는 구조적 압박의 소리다. "장사가 아니라 전쟁 같다"는 그들의 고백은 과장이 아니라 정확한 현실 진단이다.
이 절규는 1949년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 주인공 윌리 로먼이 토해냈던 외침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경쟁이 미쳐버릴 정도야!(The competition is maddening!)" 평생을 영업 현장에서 일했지만 결국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시대의 흐름에 밀려난 그는, 자신이 믿었던 성공의 공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세계에서 무너졌다.
그러나 70여 년이 지난 지금, 윌리 로먼을 단순히 '시대에 뒤처진 비극적 인물'로만 읽는 건 오독이다. 그의 철학과 생존 방식은 허황된 환상이 아니라, 오늘 한국 골목상권에서 여전히 작동하는 현실적 코드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윌리 로먼이 보여준 다섯 가지 생존의 언어
1. "좋은 인상이 곧 자산이다" - 이미지 경영의 선견지명
"사업 세계에서는 외모와 인상을 남기는 사람이 성공하는 법이야." 윌리가 아들에게 전한 이 조언은 당시 많은 지식인에게 천박한 겉치레의 철학으로 조롱받았다. 하지만 21세기 자영업 현실은 윌리가 옳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오늘날 자영업의 성패는 '보여지는 것'에 달려 있다. 가게의 인테리어는 SNS에서 사진으로 소비되고, 점주의 응대 태도는 리뷰로 기록되며, 브랜드 스토리는 고객의 선택을 좌우한다. 윌리가 말한 '좋은 인상'은 이제 자기 브랜딩, 고객 관계 경영, 온라인 평판 관리라는 이름으로 진화했다. 그는 허상에 집착한 게 아니라, 보여지는 인간 자본의 중요성을 너무 일찍 간파한 선지자였던 셈이다.
프랜차이즈 점주들이 매일 고민하는 것도 결국 같은 맥락이다. 브랜드 정체성 안에서 어떻게 개인의 스토리를 만들 것인가, 지역 사회에서 어떤 이미지로 자리매김할 것인가. 윌리의 철학은 70년이 지나도 여전히 골목상권의 생존 문법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2. "경쟁은 병이 아니라 구조다" - 광기의 정상성
오늘 한국의 자영업 현장은 윌리의 탄식을 일상으로 살아간다. 물가 상승과 인건비 부담, 공급가 인상과 본사와의 수익 구조 갈등, 그리고 반경 500미터 안에 쏟아지는 동종 업체들. 경쟁은 더 이상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견뎌야 할 생활 조건이 됐다.
중요한 건 윌리가 미쳐갔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런 구조 속에서도 그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웠다는 점이다. 그의 경쟁 강박은 병리가 아니라 생존 본능의 발현이었다. 오늘의 점주들이 디지털 마케팅을 배우고, 지역 네트워크를 만들고, 배달 플랫폼 전략을 연구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의 투쟁이다. 이들은 윌리가 무너졌던 자리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세일즈맨의 시대"를 다시 쓰고 있다.
3. "환상은 희망의 기술이다" - 자기암시의 생존경제학
"나는 뉴잉글랜드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야." 윌리가 끊임없이 되뇌던 이 말을 현실 도피의 증거로 읽는 건 쉽다. 하지만 경제적 불안 속에서 자신을 지키려면, 어느 정도의 긍정적 환상은 회복탄력성으로 작동한다는 게 현대 심리학의 결론이다.
오늘의 자영업자들도 매일 같은 주문을 건넨다. "이번 주는 나아질 거야." "이번 이벤트가 통할 거야." 이건 허황된 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견디기 위한 심리적 생존 도구다. 윌리의 자기암시를 조롱하는 건, 새벽 배달 주문을 받으며 스스로에게 "오늘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점주들의 작은 의식을 조롱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4. "나는 오렌지 껍질이 아니다" - 구조적 폭력에 대한 인식
"오렌지를 먹고 껍질을 버리듯, 인간을 그렇게 버리면 안 돼!" 윌리의 이 한탄은 노동하는 인간이 자본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소비되는가에 대한 은유다. 그의 분노는 정당했다. 그는 회사를 위해 평생을 바쳤지만, 생산성이 떨어지자 냉정하게 버려졌다.
오늘날 프랜차이즈 산업의 구조적 불균형은 윌리 시대의 "기업의 냉혹함"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매출이 오르면 본사는 로열티를 높이고, 매출이 떨어지면 점주 책임으로 돌린다. 플랫폼은 수수료를 올리고, 임대인은 임대료를 올리지만, 정작 현장에서 땀 흘리는 점주의 몫은 줄어든다.
하지만 오늘의 점주들은 윌리처럼 무기력하게 당하지만은 않는다. 가맹점주 협의회를 만들고, 공동구매로 협상력을 높이고, SNS로 목소리를 내며 '시스템 안의 독립자'가 되려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윌리가 외로이 무너졌던 자리에서, 오늘의 자영업자들은 연대와 협력으로 생존의 새로운 경로를 만들어가고 있다.
5. "존엄은 매출보다 중요하다" - 경제적 품격의 실천
윌리의 마지막 선택은 생명보험금을 남기려는 절망의 거래였지만, 동시에 그건 "인간의 가치는 돈으로만 측정될 수 없다"는 묵시적 항거이기도 했다. 그는 시스템에 굴복하면서도, 동시에 가족과 신념을 지키려는 인간 존엄의 마지막 표현을 선택했다.
오늘의 프랜차이즈 점주들에게도 비슷한 순간들이 있다. 수익을 위해 품질을 낮출 것인가, 아니면 손해를 보더라도 신뢰를 지킬 것인가. 단기 이익을 위해 직원을 함부로 대할 것인가, 아니면 관계를 소중히 여길 것인가. 이런 선택의 순간마다 그들은 "그래도 내 이름으로 하는 장사"라는 자존심을 선택한다.
이게 바로 현대판 윌리 로먼의 항거다. 패배가 아니라 존엄을 지키는 경제적 품격의 실천이다. 규모보다 관계를, 매출보다 신뢰를 택하는 그 선택들이 모여, 골목상권은 단순한 거래의 공간이 아닌 인간적 신뢰의 장소로 남아 있다.
"관심이 필요합니다" - 보이지 않는 노동의 가치
희곡의 마지막 장면에서 윌리의 아내 린다는 외친다. "윌리에게 관심이 필요해요." 그에게 관심이, 인정이, 존중이 필요했다고. 그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평범하게 일하고 가족을 먹여 살리려 애썼던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고.
이 외침은 오늘 이 순간, 어려움 속에서도 가게 문을 여는 모든 점주들에게 필요한 언어다. 그들의 하루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새벽에 일어나 재료를 손질하고, 손님을 맞이하고, 밤늦게 정산하는 그 시간들은 GDP에 반영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한국 경제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노동이며, 동시에 지역 공동체를 만드는 관계의 실천이다.
윌리 로먼은 실패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팔아야만 생존할 수 있었던 시대의 불가피한 상징이었고, 동시에 그런 구조 속에서도 인간성을 지키려 애썼던 평범한 노동자였다. 오늘의 자영업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시장의 논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도, 동시에 시장이 측정할 수 없는 가치들—신뢰, 관계, 품격—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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