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은 마진콜이 한국 증시를 ATM으로 만들었다
[프랜사이트 = 박세현 기자]
2026년 2월 2일, 한국 증시는 검은 월요일을 맞았다. 코스피 지수는 전일 대비 5% 넘게 급락하며 4949포인트로 주저앉았고, 코스닥 역시 4%대 낙폭을 기록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코스피 5000 시대를 자축하던 시장은 하루 만에 패닉 상태에 빠졌다.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2025년 8월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사태의 악몽이 재현되는 것 아니냐는 공포감이 확산됐다.
이번 폭락의 발단은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연준 의장 지명에서 비롯됐다. 트럼프가 차기 연준 의장으로 지명한 케빈 워시(Kevin Warsh)는 통화 긴축 성향이 뚜렷한 매파 인사로 알려져 있다. 과거 연준 이사 시절 양적 완화와 대차대조표 확대를 비판해 온 그의 지명 소식이 전해지자, 글로벌 금융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시장 참여자들은 워시의 등장을 유동성 축소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였고, 달러화는 강세를 보인 반면 금과 은 같은 귀금속 가격은 급락했다.
특히 최근 지정학적 불안과 통화 가치 하락 우려로 자금이 몰렸던 귀금속 시장의 충격은 컸다. 설상가상으로 시카고상업거래소(CME)가 금·은 거래에 대한 증거금을 인상하면서 시장은 마진콜(Margin Call) 공포에 휩싸였다. 증시 전문가들은 부동산에 비유하면 집값은 떨어지는데 은행이 대출 한도마저 낮춰버린 상황이라며 글로벌 투자자들은 담보 부족을 메우기 위해 급하게 현금을 마련해야 했고, 가장 빠르게 팔 수 있는 주식부터 매도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왜 하필 한국이었을까? 이날 일본과 중국 증시의 낙폭은 상대적으로 작았지만, 한국 코스피만 유독 5%가 넘는 폭락을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한국 시장이 유동성 ATM 역할을 했다고 분석한다. 케빈 워시 지명으로 촉발된 강달러 현상은 원화 약세를 불러왔고, 환차손을 우려한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 주식을 대거 매도했다. 실제로 이날 외국인은 3조 2600억 원, 기관은 2조 5000억 원을 순매도하며 총 6조 원 가까운 물량을 쏟아냈다.
전문가들은 외국인 입장에서 아시아 장이 열리자마자 마진콜에 대응할 현금 확보처로 한국 시장을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최근 한국 증시가 가파르게 상승했던 만큼 차익 실현 욕구도 강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삼성전자가 6%, SK하이닉스가 8% 폭락한 것도 이런 유동성 확보 매도가 대형주에 집중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개인 투자자들의 피해는 더욱 심각했다. 코스피 5000 돌파 이후 일주일에 10% 수익은 기본이라는 낙관론이 팽배하면서 빚을 내서 주식을 사는 빚투 규모가 크게 늘어난 상황이었다. 주가가 급락하자 증권사들은 반대매매에 나섰고, 이는 다시 주가 하락을 부추기는 악순환을 낳았다. 전문가들은 상승장에서는 레버리지가 수익을 극대화하지만, 하락장에서는 변동성을 키우는 뇌관이 된다며 한국인들의 과도한 레버리지 투자를 우려했다.
금·은 ETF 열풍에 뒤늦게 뛰어든 개인 투자자들의 손실도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중국 투자자들의 차익 실현 매물까지 겹치며 귀금속 가격이 고점 대비 큰 폭으로 하락했기 때문이다. 주식과 원자재 양쪽에서 손실을 본 투자자들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 폭락은 얼마나 갈까? 다수 전문가는 펀더멘털 붕괴라기보다 수급 꼬임에 따른 일시적 유동성 발작일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2025년 8월 대폭락장도 약 한 달간의 조정기를 거친 후 반등에 성공했다. 전문가들은 케빈 워시는 명분일 뿐, 본질은 과도하게 오른 자산에 대한 차익 실현과 연쇄 청산 과정이라며 유동성 문제가 진정되면 실적이 뒷받침되는 반도체 섹터 등을 중심으로 반등을 시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안심하기엔 이르다. 케빈 워시가 청문회에서 어떤 발언을 할지, 그리고 이번 주 발표될 미국 고용지표와 빅테크 실적이 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가 변수다. 만약 워시가 강력한 긴축 의지를 천명하거나 엔비디아·마이크로소프트 등 AI 주도주들의 성장성에 의구심이 제기된다면, 조정 기간은 예상보다 길어질 수 있다.
이번 사태는 한국 증시의 구조적 취약성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펀더멘털과 무관하게 글로벌 자금 사정에 따라 언제든 ATM처럼 현금이 인출될 수 있다는 한계다. 코스피 5000이라는 화려한 숫자에 취해 리스크 관리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닌지, 2월의 첫 월요일이 한국 증시에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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