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치플레이션, 직장인의 점심 풍경을 바꾸다
허양 기자
yheo@fransight.kr | 2025-09-19 20:13:27
[프랜사이트 = 허양 특별취재팀장]
한때 7천 원이면 푸짐하게 즐길 수 있던 점심 한 끼가 이제는 1만 원을 훌쩍 넘는 것이 일상이 됐다. 직장인들에게 점심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동료와의 소통, 하루를 버티게 하는 작은 위안이었다. 그러나 최근 ‘런치플레이션(점심값 인플레이션)’은 이 소소한 여유마저 빼앗고 있다. 한국소비자원 자료에 따르면, 올해 7월 서울 지역 비빔밥 평균 가격은 1만 1,538원, 김치찌개 백반은 8,577원으로 5년 전보다 각각 33.4%, 28.2% 상승했다. 불과 몇 년 사이 직장인의 점심값이 ‘만원 시대’를 넘어 ‘만천 원 시대’로 들어선 셈이다.
점심 풍경의 변화
런치플레이션이 가져온 변화는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예전에는 동료들과 삼삼오오 식당을 찾아 메뉴를 고르고 담소를 나누는 것이 점심시간의 중요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편의점 도시락, 대형마트 식품 코너, 배달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혼밥’이 익숙한 장면이 됐다. 특히 신입사원이나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식사보다 커피 한 잔이 더 합리적”이라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점심 한 끼 가격이 1만 원을 넘어서면서, 차라리 가볍게 샌드위치나 김밥으로 해결하고 그 비용을 다른 데 쓰겠다는 것이다. 소셜미디어에는 ‘점심값 아끼기 챌린지’ 같은 콘텐츠가 꾸준히 등장하고, 기업 구내식당의 인기가 다시 높아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런치플레이션의 배경에는 복합적인 요인이 얽혀 있다. 가장 먼저 꼽히는 것은 임대료와 인건비 상승이다. 외식업계 관계자들은 최근 몇 년 사이 인건비가 20% 이상 상승했고, 도심 상권의 임대료는 여전히 높은 수준이라고 말한다. 원재료 가격 상승도 치명적이다. 원화 가치 하락으로 수입 농축산물 가격이 올라간 데다, 국제 농산물 가격 자체가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 기후변화라는 변수가 얹혔다. 폭염, 가뭄, 홍수는 주요 곡물 생산량을 크게 줄였고, 이는 곧바로 가격 인상으로 이어졌다. 이른바 히트플레이션(Heatflation) 현상이다. 지구 온난화가 ‘농작물 수확량 감소 → 가격 인상 → 외식 물가 부담’이라는 구조적 악순환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변수는 지정학적 리스크다.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갈등, 신냉전 구도는 곡물 수급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정치적 요인으로 촉발된 식품 가격 상승을 일부에서는 폴리틱플레이션(Politicflation)이라 부르기도 한다. 곡물 가격이 안정되기는커녕 ‘널뛰기 장세’를 반복하다가 결국 ‘올라가기만 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신조어가 보여주는 시대의 풍경
런치플레이션 외에도 최근 몇 년 사이 신조어들이 쏟아지고 있다. 애그플레이션(Eggflation)은 달걀 가격 상승, 밀크플레이션(Milkflation)은 우유 가격 상승을 가리킨다. 특정 식품의 가격 급등이 전체 외식 물가로 전이되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신조어가 단순 유행어를 넘어, 경제·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보편적인 언어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소비자들이 체감하는 물가 압박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반증하는 현상이다. ‘런치플레이션’이라는 말에 직장인들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다. 언어가 곧 현실을 반영하는 셈이다.
프랜차이즈 산업의 대응
런치플레이션은 단순히 점심 한 끼 가격의 문제가 아니다. 외식 산업 전반, 나아가 프랜차이즈 비즈니스 모델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소비자들은 점심 한 끼에도 가성비를 따지고, 이는 곧 프랜차이즈 본사의 메뉴 전략과 가격 정책에도 반영된다. 최근 일부 브랜드가 ‘점심 특가 메뉴’나 ‘소용량 제품’을 내놓는 것도 이러한 흐름의 결과다. 일부 프랜차이즈 본사는 직장인 점심 수요에 맞춘 세트 구성 간소화 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예를 들어, 대표 메뉴와 사이드 한 가지로 간단히 구성해 가격을 9,900원 이하로 맞추는 식이다. 또 다른 사례로는 구독형 점심 패스 도입이 있다. 일정 금액을 내면 월 단위로 점심을 할인받을 수 있는 서비스로, 꾸준히 고객을 붙잡는 전략이다.
정부와 지자체 역시 식자재 가격 안정을 위한 대응에 나서고 있다. 농축산물 비축 확대, 해외 수입선 다변화, 온라인 직거래 활성화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런 조치들이 실제 체감 물가 안정으로 이어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외식업계의 구조적 문제—높은 임대료, 불균형적인 원재료 의존도, 소규모 자영업자의 협상력 부족—를 함께 풀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런치플레이션은 단순한 생활 물가 상승을 넘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변화와 글로벌 리스크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거울이다. 직장인에게는 점심값 부담이 커졌다는 현실, 외식업계와 프랜차이즈 본사에는 경영 환경의 불확실성이 높아졌다는 과제가 주어졌다. 결국 해법은 단기적인 할인이나 일시적 가격 조정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외식 구조와 안정적인 식자재 공급망을 마련하는 데 있다. 동시에 소비자와 업계가 ‘가성비를 넘어 가치 소비’로 눈을 돌려야 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런치플레이션 시대, 우리는 점심 한 끼를 통해 경제와 사회의 큰 흐름을 읽고 있다. 그리고 그 작은 식탁 위에, 앞으로의 생존 전략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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